고랜드 미사일 위기 Goland Missile Crisis | |
기간 | 1988년 10월 14일 ~ 10월 28일 |
장소 | |
원인 | 사비에트의 「둑 계획」에 따른 중거리 탄도미사일 배치 |
결과 | 사비에트의 미사일 철수와 잔류군 계획 폐기 루이나의 비공개 양보 (10.28 양해각서) |
당사국 | |
지도자 | |
피해 | 루이나 조종사 1명 사망, 1명 억류 사비에트군 11명 사망 |
1. 개요 [편집]
고랜드 북부의 미사일은 6분이면 벨포르에 닿습니다. 우리는 6분짜리 평화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1988년 10월 22일,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 루이나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
1988년 10월 14일 루이나의 정찰기가 고랜드 북부에서 사비에트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진지를 포착하면서 시작되어, 10월 28일 사비에트가 미사일 철수를 발표할 때까지 두 나라가 군사적으로 대치한 사건.
위기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의 막바지, 사비에트군이 제네바 협정에 따라 고랜드에서 철수하던 도중에 일어났다. 철군에 반대하던 사비에트 군부는 철군 이후 고랜드 공산 정권을 지킬 보험으로 잔류 병력 약 5만 명과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고랜드에 남기는 「둑 계획」을 철군의 조건으로 관철했고, 이를 제네바 협정이 허용한 '동맹국에 대한 무기 공급'으로 포장했다. 루이나는 이를 협정 위반이자 루이나 본토와 유고랜드를 겨냥한 기습 능력으로 규정했다.
고랜드는 사비에트와 육로로 이어져 있어 바다를 막는 것만으로는 미사일의 반입을 멈출 수 없었다. 루이나는 해상 검역과 비행금지 선포, 유고랜드 전진 배치, 막 발효된 센츄리움 궤도협정의 이행 정지 경고를 겹쳐 사비에트를 압박했다. 2주 동안 국경에서는 무자헤딘의 매복과 정찰기 격추가 잇따랐고, 궤도에서는 두 나라의 요격 전력이 다시 서로를 겨누었다.
위기는 10월 28일 사비에트 서기장 보리스 카멘스키가 미사일 철수와 잔류군 계획의 폐기를 발표하면서 끝났다. 겉으로는 사비에트의 일방적인 후퇴였지만, 그 뒤에는 루이나가 고랜드 정부에 대한 불침과 유고랜드 배치 전력의 철수를 약속한 비공개 양해각서가 있었다. 이 각서는 이듬해 3.29 헌정위기 이후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위기를 '조건 없는 철수를 받아낸 승리'로 선전하며 3선 출마의 명분으로 삼았던 베인브리지의 주장이 사실과 달랐던 것이다.
2. 배경 [편집]
2.1. 1984년의 기억 [편집]
1988년의 위기는 두 나라가 핵 위기를 한 번 겪은 뒤에 찾아왔다. 1984년 5월 마테르 전쟁 중에 사비에트의 궤도 연구 위성 1127호가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에 40km까지 다가가자, 루이나는 전략잠수함을 출항시켰다. 이 정지궤도 위기에서 두 나라는 1965년 개설된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17차례 교신하며 충돌을 피했고, 그 경험은 1987년 센츄리움 궤도협정으로 이어졌다.
1984년의 교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통선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기가 두 수도의 의도가 아니라 현장의 기계와 사람에게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88년의 위기는 앞의 교훈 덕분에 끝났고, 뒤의 교훈을 다시 확인시켰다.
1984년의 교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통선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기가 두 수도의 의도가 아니라 현장의 기계와 사람에게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88년의 위기는 앞의 교훈 덕분에 끝났고, 뒤의 교훈을 다시 확인시켰다.
2.2. 철군과 제네바 협정 [편집]
1986년 11월 사비에트 정치국은 2년 안에 고랜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는 방침을 비밀리에 정했다. 카멘스키 지도부에게 고랜드 전쟁은 재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짐이었다. 11만 명이 넘는 병력과 해마다 늘어나는 전비, 봉인된 관으로 돌아오는 전사자는 재편이 약속한 새로운 사비에트와 양립할 수 없었다.
1988년 4월 14일 제네바에서 고랜드와 유고랜드가 상호 내정 불간섭과 난민 귀환을 약속하는 협정에 서명했고,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보증국으로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사비에트군은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해 8월 15일까지 절반을, 이듬해 2월 15일까지 전원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협정은 두 후원국이 각자의 동맹에게 무기를 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루이나는 무자헤딘에게, 사비에트는 나지불라 정권에 계속 무기를 보낼 수 있었다. 둑 계획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다.
1988년 4월 14일 제네바에서 고랜드와 유고랜드가 상호 내정 불간섭과 난민 귀환을 약속하는 협정에 서명했고, 루이나와 사비에트가 보증국으로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사비에트군은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해 8월 15일까지 절반을, 이듬해 2월 15일까지 전원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협정은 두 후원국이 각자의 동맹에게 무기를 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루이나는 무자헤딘에게, 사비에트는 나지불라 정권에 계속 무기를 보낼 수 있었다. 둑 계획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다.
2.3. 둑 계획 [편집]
우리가 물러나는 순간 강물은 아바나까지 밀려올 것이다. 떠나려면 먼저 둑을 쌓아야 한다.세묜 I. 바라노프 국방인민위원장, 1988년 3월 정치국 회의
철군 방침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은 군부였다. 9년 동안 싸운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었고, 총참모부는 나지불라 정권이 철군 뒤 몇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군부는 1987년 10월 서명된 센츄리움 궤도협정에도 불만이 컸다. 부분궤도 폭격체계 메치의 발사대 18기를 해체해야 하는 이 협정은 군 안에서 '무장 해제 조약'이라 불리고 있었다.
1988년 3월 국방인민위원장 세묜 I. 바라노프와 총참모장 올레크 P. 스미르닌은 정치국에 「고랜드 민주공화국 방위 지원에 관한 계획」을 제출했다. 군 내부에서 「둑」(Плотина)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계획의 골자는 세 가지였다. 첫째, 철수 대상 부대 가운데 약 5만 명을 '고랜드 방위 지원단'으로 재편해 고랜드 정부군 소속 고문단의 명목으로 남긴다. 둘째, 고랜드 북부에 K-14 중거리 탄도미사일 연대 3개를 배치해 철군 이후 유고랜드와 루이나가 고랜드 내전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도록 억지한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제네바 협정이 허용하는 동맹국 무기 공급으로 처리한다. 계획에 따라 편성될 방위 지원단의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전략군: K-14 중거리 탄도미사일 연대 3개 (발사대 24기, 미사일 36발)
육군: 차량화소총사단 2개, 공수연대 1개, 공병·통신 부대
방공군: 지대공 미사일 여단 2개, 전투기 연대 1개
해군: 산마르코 항 경비를 위한 초계함 전대와 수송선단
고문단: 고랜드 정부군 각급 부대에 배속될 군사고문 약 3천 명
K-14는 제7설계국이 1970년대 후반 실전 배치한 이동식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사거리는 약 2,500km였다. 저장성 추진제를 써서 명령 후 30분 안에 발사할 수 있었고, 핵탄두 한 발을 싣도록 설계되었다. 방위 지원단의 미사일은 사비에트군이 직접 운용하고 발사 권한도 크라슬리스크에 두도록 되어 있었는데, 서류상으로만 고랜드 정부군 소유로 넘어갔다.
카멘스키는 처음 이 계획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부는 둑 계획을 철군 동의와 궤도협정 비준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비준이 좌초하면 카멘스키가 가장 공을 들인 대외 성과가 무너질 판이었다. 3월 24일 정치국은 둑 계획을 승인했고, 최고인민평의회는 4월 26일 궤도협정을 만장일치로 비준했다. 연구자들은 둑 계획을 '철군과 궤도협정을 얻기 위해 카멘스키가 치른 값'으로 본다.
입안자들이 말한 미사일의 목적은 공격이 아니라 억지였다. 고랜드 북부에서 발사한 K-14는 유고랜드 전역과 루이나 남부 해안의 해군기지, 수도 벨포르까지 6~8분 안에 닿을 수 있었고, 이 짧은 경보 시간이 루이나로 하여금 철군 이후의 고랜드에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루이나에서 보면 그것은 억지가 아니라 기습 능력이었다. 조기경보위성이 발사를 포착하더라도 대통령에게 남는 판단 시간은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2.4. 1988년의 루이나 [편집]
루이나는 이 무렵 제5공화국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1987년 가을 마테르 전쟁의 휴전 이후에도 유지되던 계엄은 12.23 민주화운동과 1988년 1월 10일의 1.10 민주화 선언을 거쳐 2월에 형식적으로 해제되었지만, 비상조치의 상당수는 개별 법령으로 옮겨져 그대로 남았다. 직선제 개헌은 지연되었고, 하반기부터 정부·여당 안에서는 '개헌 완수를 위한 임기 유지'라는 논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베인브리지 정부는 고랜드 무자헤딘의 최대 후원자였다. 1985년 4월에는 유고랜드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루이나군을 주둔시켰고, 1986년에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전술 미사일 여단을 유고랜드에 전개했다. 사비에트는 이 여단을 둑 계획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한편 1987년 궤도협정에 서명한 베인브리지는 강한 대통령과 평화의 대통령이라는 두 이미지를 함께 원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베인브리지 정부는 고랜드 무자헤딘의 최대 후원자였다. 1985년 4월에는 유고랜드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루이나군을 주둔시켰고, 1986년에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전술 미사일 여단을 유고랜드에 전개했다. 사비에트는 이 여단을 둑 계획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한편 1987년 궤도협정에 서명한 베인브리지는 강한 대통령과 평화의 대통령이라는 두 이미지를 함께 원하고 있었다.
3. 전개 [편집]
3.1. 반입 [편집]
둑 계획의 장비는 두 경로로 들어갔다. 발사대와 운반 차량, 공병 장비는 테르미스크의 「우정의 다리」를 건너는 육로로 들어갔다. 다리는 철수하는 제40군의 북행 행렬로 밤낮없이 붐볐는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차량들은 '고랜드 정부군 인도 장비'라는 서류를 달고 철수 행렬 사이에 끼어 들어갔다. 미사일 본체와 연료, 핵탄두는 다리의 혼잡과 하중 제한 때문에 사비에트 남부 군항에서 화물선에 실려 고랜드 북부 연안의 산마르코 항으로 운반되었다.
발사 진지는 고랜드 북부 고원의 사만간과 풀리후므리 일대 세 곳에 들어섰다. 8월 15일 사비에트군 절반의 철수가 끝났을 때, 고랜드에 남은 병력 가운데 약 2만 명은 이미 방위 지원단 소속으로 명찰을 바꿔 단 상태였다. 사비에트 외무성은 루이나의 질의에 "고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른 방어용 장비 인도가 진행 중일 뿐"이라고 답했다.
발사 진지는 고랜드 북부 고원의 사만간과 풀리후므리 일대 세 곳에 들어섰다. 8월 15일 사비에트군 절반의 철수가 끝났을 때, 고랜드에 남은 병력 가운데 약 2만 명은 이미 방위 지원단 소속으로 명찰을 바꿔 단 상태였다. 사비에트 외무성은 루이나의 질의에 "고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른 방어용 장비 인도가 진행 중일 뿐"이라고 답했다.
3.2. 발각 [편집]
루이나 정보당국은 여름부터 이상 징후를 보고 있었다. 7월 해군정보부(ONI)는 사비에트 남부 군항을 떠나 고랜드로 가는 화물선들이 통상보다 깊이 잠긴 채 야간에만 입항한다는 사실을 포착했고, 8월 NIA는 철수가 한창인 테르미스크 다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대형 운반 차량이 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찰위성 사진은 위장망과 흙먼지에 가려 판독이 어려웠고, 국가정찰국은 9월 말까지 '대공 미사일 진지의 확장'이라는 판단을 유지했다.
10월 14일 유고랜드 아부 쿠찬 공군기지를 이륙한 U-2 정찰기가 국경선을 따라 비스듬히 찍은 사진에서 사만간 진지의 발사대 기립 장치와 연료 운반차가 확인되었다. 사진은 이튿날 새벽 벨포르의 대통령궁에 전달되었다. 발사 준비를 마친 K-14는 아직 없었지만, 국가정찰국은 열흘 안에 첫 연대가 발사 태세를 갖출 것으로 판단했다.
10월 14일 유고랜드 아부 쿠찬 공군기지를 이륙한 U-2 정찰기가 국경선을 따라 비스듬히 찍은 사진에서 사만간 진지의 발사대 기립 장치와 연료 운반차가 확인되었다. 사진은 이튿날 새벽 벨포르의 대통령궁에 전달되었다. 발사 준비를 마친 K-14는 아직 없었지만, 국가정찰국은 열흘 안에 첫 연대가 발사 태세를 갖출 것으로 판단했다.
3.3. 국가안보회의 [편집]
베인브리지는 10월 15일 국가안보회의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에는 국가안보보좌관 사이러스 W. 헤일, 국방장관 더글러스 M. 캐럴, NIA 국장 윌리엄 J. 스톤, 국방참모본부 의장 오스카 L. 브래넌 해군대장 등이 참여했다.
군은 공습을 주장했다. 공군은 세 곳의 진지를 하루 안에 파괴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진지마다 수백 명의 사비에트 병사가 있었고 핵탄두가 이미 들어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비에트 병사가 죽는 순간 그것은 고랜드 내전이 아니라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전쟁이 되었다. 해군은 해상 봉쇄를 제안했으나, 고랜드는 사비에트와 육로로 이어져 있어 바다만 막아서는 반입을 멈출 수 없다는 반론이 곧바로 나왔다.
위원회에 올라온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미사일을 묵인하고 외교적 항의에 그치는 안, 진지를 공습하는 안, 고랜드 전역을 봉쇄하는 안, 그리고 사비에트와 조용히 협상하는 안이었다. 묵인은 선거를 앞둔 정부가 택할 수 없었고, 공습은 사비에트 병사의 죽음을, 협상은 약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뜻했다.
결론은 한 가지 수단이 아니라 여러 압박을 겹치는 것이었다. 바다에서는 핵탄두와 연료를 실은 화물선을 막고, 하늘에서는 공수를 막되, 막을 수 없는 땅의 대가는 사비에트가 가장 아끼는 것에 매긴다는 구상이었다. 헤일은 회의에서 "우리는 테르미스크의 다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카멘스키가 작년에 건너온 다른 다리를 흔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다른 다리란 궤도협정이었다.
회의록에는 또 하나의 계산이 남아 있다. 베인브리지는 10월 19일 회의에서 "이번 일은 국민에게 우리가 아직 비상시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3.29 이후 공개된 이 발언은 베인브리지가 처음부터 위기를 국내 정치의 도구로 보았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군은 공습을 주장했다. 공군은 세 곳의 진지를 하루 안에 파괴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진지마다 수백 명의 사비에트 병사가 있었고 핵탄두가 이미 들어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비에트 병사가 죽는 순간 그것은 고랜드 내전이 아니라 루이나와 사비에트의 전쟁이 되었다. 해군은 해상 봉쇄를 제안했으나, 고랜드는 사비에트와 육로로 이어져 있어 바다만 막아서는 반입을 멈출 수 없다는 반론이 곧바로 나왔다.
위원회에 올라온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미사일을 묵인하고 외교적 항의에 그치는 안, 진지를 공습하는 안, 고랜드 전역을 봉쇄하는 안, 그리고 사비에트와 조용히 협상하는 안이었다. 묵인은 선거를 앞둔 정부가 택할 수 없었고, 공습은 사비에트 병사의 죽음을, 협상은 약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뜻했다.
결론은 한 가지 수단이 아니라 여러 압박을 겹치는 것이었다. 바다에서는 핵탄두와 연료를 실은 화물선을 막고, 하늘에서는 공수를 막되, 막을 수 없는 땅의 대가는 사비에트가 가장 아끼는 것에 매긴다는 구상이었다. 헤일은 회의에서 "우리는 테르미스크의 다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카멘스키가 작년에 건너온 다른 다리를 흔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다른 다리란 궤도협정이었다.
회의록에는 또 하나의 계산이 남아 있다. 베인브리지는 10월 19일 회의에서 "이번 일은 국민에게 우리가 아직 비상시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3.29 이후 공개된 이 발언은 베인브리지가 처음부터 위기를 국내 정치의 도구로 보았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3.4. 10월 22일 연설 [편집]
10월 22일 저녁 베인브리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연설로 고랜드의 미사일 기지를 공개하고 다섯 가지 조치를 발표했다.
- 고랜드 북부 연안에 대한 해상 검역. 미사일과 핵탄두, 연료를 실은 선박의 입항을 막고, 검색을 거부하는 선박은 나포한다.
- 고랜드 북부 상공의 비행금지 선포. 사비에트 수송기의 미사일 부품 공수를 차단한다.
- 유고랜드 전진 배치. 유고랜드 주둔 루이나군을 2개 사단 증강하고 전투기 전력을 고랜드 국경 인근 기지로 옮긴다.
- 궤도협정 이행 정지 경고. 미사일이 철수하지 않으면 루이나는 센츄리움 궤도협정의 이행을 정지하고 위성 요격 시험을 재개한다.
- 제네바 협정 보증의 재검토. 사비에트가 협정을 어긴다면 루이나 역시 보증국의 의무에 묶이지 않는다.
다섯째 조치는 사실상 무자헤딘에게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를 주겠다는 위협이었다. 연설 직후 루이나군은 경계태세를 한 단계 올렸고, 유고랜드 주둔군은 전시 편제로 전환했다.
3.5. 루이나 국내의 반응 [편집]
연설은 루이나 사회를 공포에 빠뜨렸다. 남부 해안 도시들에서는 생필품 사재기가 벌어졌고, 벨포르의 방공호 위치를 묻는 전화가 시청에 폭주했다. 유고랜드가 바라다보이는 남부 해안에서는 가족을 북부의 친척 집으로 보내는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조기경보위성이 발사를 포착한 뒤 남는다는 '6분'을 두고 저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했고, 이 말은 위기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렸다. 의회 과반을 차지한 사회민주당은 사비에트의 미사일 배치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하면서도, 정부가 위기를 핑계로 개헌 일정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보수 일간지 《르 나시오날》은 공습을 주장하는 사설을 연일 실었고, 진보 일간지 《라 부아》는 "6분의 공포가 해제된 계엄을 되살리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설로 정부를 겨냥했다.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렸다. 의회 과반을 차지한 사회민주당은 사비에트의 미사일 배치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하면서도, 정부가 위기를 핑계로 개헌 일정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보수 일간지 《르 나시오날》은 공습을 주장하는 사설을 연일 실었고, 진보 일간지 《라 부아》는 "6분의 공포가 해제된 계엄을 되살리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설로 정부를 겨냥했다.
3.6. 크라슬리스크의 분열 [편집]
연설은 크라슬리스크를 둘로 갈랐다. 바라노프와 총참모부는 루이나의 검역을 '공해상의 해적 행위'로 규정하고, 화물선을 잠수함으로 호위해 검역선을 돌파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루이나가 국내 정치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외무상 게오르기 A. 체르카소프는 궤도협정의 이행 정지가 곧 제1차 우주경쟁의 재개를 뜻한다며 타협을 요구했다.
카멘스키의 처지는 곤란했다. 둑 계획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물러서면 군부는 철군과 궤도협정까지 싸잡아 굴욕이라 부를 것이었다. 10월 23일 사비에트 외무성은 성명을 내어 미사일이 "고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인도된 방어용 무기"이며 제네바 협정 어디에도 이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날 카멘스키는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베인브리지에게 첫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공개 성명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카멘스키의 처지는 곤란했다. 둑 계획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물러서면 군부는 철군과 궤도협정까지 싸잡아 굴욕이라 부를 것이었다. 10월 23일 사비에트 외무성은 성명을 내어 미사일이 "고랜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인도된 방어용 무기"이며 제네바 협정 어디에도 이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날 카멘스키는 벨포르-크라슬리스크 직통선으로 베인브리지에게 첫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공개 성명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고랜드를 위해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부터 함께 따져 봅시다.1988년 10월 23일, 카멘스키가 직통선으로 보낸 첫 메시지
고랜드의 나지불라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미사일과 방위 지원단은 사비에트가 떠난 뒤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유일한 보증이었다. 나지불라는 사비에트 대사를 통해 "미사일을 거두는 것은 우리를 거두는 것과 같다"는 전언을 크라슬리스크에 보냈다.
사비에트의 후원국인 소련은 공식적으로 사비에트를 지지했으나, 비공식 경로로는 조기 수습을 거듭 요구했다. 랜드해협의 핵 위기가 소련 자신의 대외 관계까지 흔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7. 검역과 국경 [편집]
10월 24일 오전 검역이 시작되었다. 루이나 해군은 항공모함 2척을 포함한 함정 60여 척으로 고랜드 북부 연안을 에워쌌다. 첫 시험은 같은 날 오후에 왔다. 사비에트 화물선 「카스탄」 호가 잠수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며 검역선으로 다가왔다. 루이나 구축함이 정선 신호를 보내는 사이 호위 잠수함은 검역 함대 아래로 파고들었다가 대잠 헬리콥터에 추적당했다. 두 시간 가까운 대치 끝에 카스탄 호는 크라슬리스크의 지시로 뱃머리를 돌렸다. 루이나 해군은 이 배에 핵탄두 수송 용기가 실려 있었다고 판단했지만, 사비에트는 지금까지 이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바다와 달리 땅은 막을 수 없었다. 테르미스크 다리에서는 철수 행렬과 반입 행렬이 여전히 엇갈렸고, 루이나 정찰기는 매일 늘어나는 차량을 세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대신 루이나는 국경을 다른 방식으로 압박했다.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 부로 증강된 루이나군이 고랜드 국경 쪽으로 이동하자, 방위 지원단도 발사 진지 주변에 대공 미사일 포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9년의 전쟁 동안 대리 세력을 사이에 두고 싸워 온 두 나라의 정규군이 처음으로 국경 하나를 두고 직접 마주 선 것이다.
10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루이나 대사 마거릿 A. 홀리스는 사만간 진지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비에트 대사 파벨 M. 쇼린은 사진이 진짜인지 따지지 않았다. 그는 "루이나는 1986년 유고랜드에 전술 핵미사일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때 이 회의장에 사진을 들고 온 나라는 없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같은 날 센츄리움에서는 궤도협정의 상설협의위원회가 루이나의 요청으로 처음 긴급 소집되었다. 루이나 대표단은 미사일이 철수하지 않으면 협정 이행을 정지하겠다는 통고문 초안을 위원회에 내놓았다.
바다와 달리 땅은 막을 수 없었다. 테르미스크 다리에서는 철수 행렬과 반입 행렬이 여전히 엇갈렸고, 루이나 정찰기는 매일 늘어나는 차량을 세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대신 루이나는 국경을 다른 방식으로 압박했다.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 부로 증강된 루이나군이 고랜드 국경 쪽으로 이동하자, 방위 지원단도 발사 진지 주변에 대공 미사일 포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9년의 전쟁 동안 대리 세력을 사이에 두고 싸워 온 두 나라의 정규군이 처음으로 국경 하나를 두고 직접 마주 선 것이다.
10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루이나 대사 마거릿 A. 홀리스는 사만간 진지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비에트 대사 파벨 M. 쇼린은 사진이 진짜인지 따지지 않았다. 그는 "루이나는 1986년 유고랜드에 전술 핵미사일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때 이 회의장에 사진을 들고 온 나라는 없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같은 날 센츄리움에서는 궤도협정의 상설협의위원회가 루이나의 요청으로 처음 긴급 소집되었다. 루이나 대표단은 미사일이 철수하지 않으면 협정 이행을 정지하겠다는 통고문 초안을 위원회에 내놓았다.
3.8. 사만간 매복 [편집]
10월 26일 새벽 사만간 진지로 향하던 사비에트 연료 운반 행렬이 계곡 도로에서 무자헤딘의 매복을 받았다.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당 소속으로 알려진 공격대는 루이나제 무반동포로 운반차 네 대를 파괴했고, 사비에트 병사 11명이 숨졌다. 루이나와 사비에트 어느 쪽도 원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루이나는 위기 동안 무자헤딘에게 진지 공격을 자제하라는 전언을 보냈지만, 제네바 협정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무자헤딘 정당들은 이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방위 지원단 사령관 알렉산드르 T. 부디린 상장은 곧바로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의 무자헤딘 기지에 대한 보복 공습 승인을 요청했다. 루이나군이 전진 배치된 바로 그 지역이었다. 카멘스키는 요청을 거부하고 부디린에게 "국경 너머로는 포탄 한 발도 넘기지 말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통신 사정 때문에 반나절 뒤에야 현지 부대에 닿았다.
방위 지원단 사령관 알렉산드르 T. 부디린 상장은 곧바로 유고랜드 나시르 알 물크의 무자헤딘 기지에 대한 보복 공습 승인을 요청했다. 루이나군이 전진 배치된 바로 그 지역이었다. 카멘스키는 요청을 거부하고 부디린에게 "국경 너머로는 포탄 한 발도 넘기지 말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통신 사정 때문에 반나절 뒤에야 현지 부대에 닿았다.
3.9. 긴 목요일 [편집]
우리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둘 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뿐이다.사이러스 W. 헤일 전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 《6분》(1996)
10월 27일 목요일은 위기의 정점이었다. 오전 유고랜드 국경을 따라 비행하던 루이나 공군의 RF-4 정찰기가 고랜드 영공을 1km 남짓 넘어섰다가 방위 지원단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조종사 대니얼 P. 오하라 소령은 숨졌고, 후방석의 정찰 장교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가 고랜드 정부군에 붙잡혔다. 격추를 지시한 것은 사만간 매복 이후 경계를 최고 단계로 올린 현지 대공 부대 지휘관이었고, 크라슬리스크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보고를 받았다.
벨포르에서는 브래넌 의장과 공군이 즉각적인 보복 공습을 요구했다. 같은 시각 사르다 발사장에서는 위성 요격체 야스트레브가 발사 대기 태세에 들어갔고, 루이나의 조기경보위성이 사르다의 움직임을 포착하자 루이나 전략공군은 폭격기를 민간 공항으로 분산시켰다. 궤도협정이 금지한 요격 시험은 어느 쪽도 하지 않았지만, 협정이 발효된 지 다섯 달 만에 두 나라의 요격 전력은 다시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베인브리지는 공습을 24시간 미뤘다. 그날 저녁 헤일은 벨포르 시내의 한 호텔에서 사비에트 대사 빅토르 N. 사블린을 비밀리에 만났다. 두 사람은 사흘 전부터 직통선과 별도로 비공식 창구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블린은 카멘스키의 두 번째 제안을 가져왔다. 사비에트가 미사일을 철수하고 방위 지원단을 해체하는 대가로, 루이나는 고랜드 정부를 공격하지 않고 유고랜드의 전술 미사일 여단을 철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헤일은 여단 철수를 공개적인 거래로 만들 수는 없다고 답했다. 유고랜드가 자신이 흥정의 대상이 된 것을 알면 동맹이 흔들리고, 베인브리지는 굴복한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정 무렵 두 사람은 합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초안에 합의했다.
같은 날 밤 크라슬리스크의 정치국 회의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바라노프는 RF-4 격추를 '정당한 영공 방어'라며 물러설 이유가 없다고 맞섰으나, 카멘스키는 미사일이 남아 있는 한 다음 격추는 핵전쟁이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표결 없이 끝난 회의에서 카멘스키는 서기장의 권한으로 철수를 결정했다.
3.10. 미사일 철수 [편집]
10월 28일 정오 카멘스키는 라디오 연설로 "고랜드 인민의 안전이 충분히 보장되었다고 판단해" 고랜드에 인도한 중거리 미사일을 회수하고, 사비에트군 전원을 제네바 협정대로 1989년 2월 15일까지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내용이 직통선으로 벨포르에 전달되었고, 베인브리지는 두 시간 뒤 검역과 비행금지의 해제를 발표했다. 붙잡힌 RF-4의 정찰 장교는 11월 3일 유고랜드 국경에서 루이나 측에 인도되었다.
미사일의 회수는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루이나는 정찰기와 정찰위성으로 진지의 해체를 확인했고, 마지막 K-14 발사대는 12월 9일 테르미스크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갔다. 방위 지원단은 해체되어 다른 철수 부대와 함께 떠났다. 이듬해 2월 15일 제40군 사령관 예브게니 V. 로디오노프 중장은 다리를 건넌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되었다. 그가 기자들에게 남긴 "내 뒤에는 사비에트 병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둑 계획의 완전한 폐기를 확인하는 말이기도 했다.
미사일의 회수는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루이나는 정찰기와 정찰위성으로 진지의 해체를 확인했고, 마지막 K-14 발사대는 12월 9일 테르미스크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갔다. 방위 지원단은 해체되어 다른 철수 부대와 함께 떠났다. 이듬해 2월 15일 제40군 사령관 예브게니 V. 로디오노프 중장은 다리를 건넌 마지막 사비에트 군인이 되었다. 그가 기자들에게 남긴 "내 뒤에는 사비에트 병사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둑 계획의 완전한 폐기를 확인하는 말이기도 했다.
4. 10.28 양해각서 [편집]
헤일과 사블린이 10월 27일 밤 합의한 문서는 이튿날 양국 정상의 서명 없이 두 사람의 가서명만으로 교환되었다. 루이나에서는 「10.28 양해각서」, 사비에트에서는 「사블린 문서」라 불린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각서의 존재는 베인브리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1989년 3.29 헌정위기 이후 검찰이 압수한 대통령궁 문서철에서 각서 사본과 10월 19일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이 나왔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를 "피고인이 국가 안보 위기를 사유화한 정황"으로 언급했다. 베인브리지는 위기 직후부터 사비에트가 "아무 조건 없이" 물러났다고 주장해 왔고, 12월 2일 3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도 "고랜드의 미사일을 몰아낸 결단"을 자신이 한 번 더 필요한 이유로 들었다.
사비에트에서는 1990년 재편기의 정보 공개로 둑 계획의 존재가 처음 인정되었으나, 사블린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비에트 정부는 지금도 위기를 "사비에트의 평화 의지가 핵전쟁을 막은 사건"으로 서술하며 양해각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사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고랜드 민주공화국에 인도한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그 부속 장비를 1988년 12월 31일까지 회수하고, 고랜드 방위 지원단을 해체한다.
- 루이나 공화국은 고랜드 민주공화국 정부에 대한 직접 군사행동을 하지 않으며, 제3국 영토로부터의 정규군 침공을 지원하지 않는다.
- 루이나 공화국은 유고랜드 공화국에 전개한 전술 미사일 여단을 1989년 중 철수하고, 유고랜드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지 않는다.
- 양측은 1988년 4월 14일 제네바 협정에 따른 동맹국에 대한 재래식 무기 공급을 서로 문제 삼지 않는다.
- 양측은 이 각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각서의 존재는 베인브리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1989년 3.29 헌정위기 이후 검찰이 압수한 대통령궁 문서철에서 각서 사본과 10월 19일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이 나왔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를 "피고인이 국가 안보 위기를 사유화한 정황"으로 언급했다. 베인브리지는 위기 직후부터 사비에트가 "아무 조건 없이" 물러났다고 주장해 왔고, 12월 2일 3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도 "고랜드의 미사일을 몰아낸 결단"을 자신이 한 번 더 필요한 이유로 들었다.
사비에트에서는 1990년 재편기의 정보 공개로 둑 계획의 존재가 처음 인정되었으나, 사블린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사비에트 정부는 지금도 위기를 "사비에트의 평화 의지가 핵전쟁을 막은 사건"으로 서술하며 양해각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5. 각국의 반응 [편집]
소련은 사비에트의 후원국으로서 공식적으로는 사비에트를 지지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위기 내내 크라슬리스크에 조기 수습을 요구했고, 10월 28일 발표 직후 "사비에트 지도부의 책임 있는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가장 먼저 냈다.
미합중제국은 루이나를 지지하고 해상 검역에 정찰 자료를 제공했으나, 궤도협정의 이행 정지 경고에는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유고랜드는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나라였다. 유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군의 증강을 환영했지만, 고랜드 국경과 가까운 남부의 난민촌과 도시들에서는 사비에트의 보복 공습을 두려워한 주민들의 피란이 이어졌다. 국경을 넘나드는 무자헤딘을 통제하지 못한 유고랜드 군정보국은 사만간 매복 이후 루이나와 사비에트 양쪽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했다.
청평은 1960년대 사비에트와 결별한 이래의 노선대로 양쪽을 모두 비판했다. 청평 외교부는 "두 패권국이 남의 땅에서 핵을 겨루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파랜드 등 해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은 사비에트를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나, 동맹군 부대의 경계태세는 올리지 않았다.
미합중제국은 루이나를 지지하고 해상 검역에 정찰 자료를 제공했으나, 궤도협정의 이행 정지 경고에는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유고랜드는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나라였다. 유고랜드 정부는 루이나군의 증강을 환영했지만, 고랜드 국경과 가까운 남부의 난민촌과 도시들에서는 사비에트의 보복 공습을 두려워한 주민들의 피란이 이어졌다. 국경을 넘나드는 무자헤딘을 통제하지 못한 유고랜드 군정보국은 사만간 매복 이후 루이나와 사비에트 양쪽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했다.
청평은 1960년대 사비에트와 결별한 이래의 노선대로 양쪽을 모두 비판했다. 청평 외교부는 "두 패권국이 남의 땅에서 핵을 겨루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파랜드 등 해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은 사비에트를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냈으나, 동맹군 부대의 경계태세는 올리지 않았다.
6. 영향 [편집]
6.1. 사비에트 [편집]
위기는 카멘스키에게 절반의 승리이자 절반의 패배였다. 그는 원하지 않던 둑 계획을 위기를 명분으로 폐기했고, 철군과 궤도협정을 지켜 냈다. 1988년 11월 바라노프 국방인민위원장과 스미르닌 총참모장은 경질되었다. 그러나 군부의 눈에 10월 28일은 사비에트가 루이나의 최후통첩 앞에 무릎을 꿇은 날이었다. 양해각서의 존재를 알지 못한 대부분의 장교에게 사비에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고, 이 기억은 고랜드 철군, 궤도협정과 함께 1991년 카멘스키를 실각시킨 보수파의 '세 번의 굴욕'으로 남았다.
6.2. 고랜드 [편집]
나지불라는 미사일 철수 소식을 크라슬리스크의 통보가 아니라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다. 그는 사비에트 대사를 불러 항의했지만, 사비에트는 미사일 대신 재래식 무기로 그를 달랬다. 1988년 말부터 사비에트는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전투기, 대량의 탄약을 고랜드 정부군에 넘겼고, 이 무기들은 1989년 3월 잘랄라바드를 공격한 무자헤딘을 막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둑은 무너졌지만, 사비에트가 남긴 무기는 나지불라 정권이 철군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은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무자헤딘에게 위기는 두 강대국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거래를 한다는 확신을 남겼다. 사만간 매복을 벌인 이슬람당은 이후 루이나의 자제 요청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무자헤딘과 후원국 사이의 틈은 전후 내전에서 더 벌어졌다.
무자헤딘에게 위기는 두 강대국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거래를 한다는 확신을 남겼다. 사만간 매복을 벌인 이슬람당은 이후 루이나의 자제 요청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무자헤딘과 후원국 사이의 틈은 전후 내전에서 더 벌어졌다.
6.3. 루이나 [편집]
위기 직후 베인브리지의 지지율은 크게 올랐다. 정부와 여당은 위기를 루이나가 아직 비상시국에 있다는 증거로 내세웠고, 지연되던 직선제 개헌은 다시 뒤로 밀렸다. 12월 2일의 3선 출마 선언은 이 분위기 위에서 나왔다. 그러나 의회와 시민사회는 위기를 빌린 임기 연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선언은 넉 달 뒤 3.29 헌정위기로 이어졌다. 오늘날 루이나에서 고랜드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 직전까지 간 외교 위기이자, 한 대통령이 안보 위기를 권력 연장의 명분으로 삼으려 한 사례로 함께 기억된다.
양해각서에 따라 유고랜드의 전술 미사일 여단은 1989년 9월 철수했다. 3.29 이후 들어선 정부는 이를 '유고랜드 주둔군의 재편'이라고만 발표했다.
양해각서에 따라 유고랜드의 전술 미사일 여단은 1989년 9월 철수했다. 3.29 이후 들어선 정부는 이를 '유고랜드 주둔군의 재편'이라고만 발표했다.
6.4. 유고랜드 [편집]
유고랜드는 자국 영토에 배치된 전력이 흥정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1989년 베인브리지 재판 보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 유고랜드 정부는 루이나에 공식 항의했고, 1991년 주둔군지위협정 1차 개정 협상에서 주둔 루이나군의 무기 배치에 대한 사전 협의 조항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5. 궤도협정 [편집]
센츄리움 궤도협정은 발효 다섯 달 만에 첫 시험을 치렀다. 루이나의 이행 정지 통고는 끝내 제출되지 않았지만, 상설협의위원회의 긴급 소집은 두 나라가 궤도 밖의 위기에서도 협정을 지렛대로 쓰는 선례가 되었다. 1989년 두 나라는 정상 간 직통선과 별도로 루이나 국방참모본부와 사비에트 총참모부를 잇는 군사 직통선을 개설했다. 사만간 매복과 RF-4 격추 때 현지 부대의 움직임을 수도가 몇 시간씩 늦게 알았던 경험 때문이었다.
7. 평가 [편집]
고랜드 미사일 위기는 두 가지 점에서 앞선 위기들과 달랐다. 첫째, 위기의 무대는 두 강대국 어느 쪽의 영토도 아닌, 내전 중인 제3국이었다. 사비에트는 떠나는 중이었고 루이나는 대리 세력을 통해서만 싸우고 있었으며,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 것은 양쪽 수도가 통제하지 못한 무자헤딘의 매복과 현지 대공 부대의 격추였다. 둘째, 위기는 양쪽 지도자 모두에게 국내 정치의 문제였다. 카멘스키는 군부와의 거래로 떠안은 계획을 위기를 빌려 털어 냈고, 베인브리지는 위기를 빌려 자신의 임기를 늘리려 했다. 연구자들은 이 위기를 '두 개의 국내 정치가 만든 하나의 핵 위기'로 요약하기도 한다.
비밀 합의가 위기를 끝냈다는 점도 논쟁거리다. 양해각서가 없었다면 카멘스키는 정치국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고, 각서가 공개되었다면 베인브리지는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비밀은 위기를 끝냈지만, 루이나에서는 3선 선언의 거짓 명분이 되었고 사비에트에서는 '굴욕'의 신화가 되어 두 나라의 국내 정치를 다시 흔들었다.
비밀 합의가 위기를 끝냈다는 점도 논쟁거리다. 양해각서가 없었다면 카멘스키는 정치국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고, 각서가 공개되었다면 베인브리지는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비밀은 위기를 끝냈지만, 루이나에서는 3선 선언의 거짓 명분이 되었고 사비에트에서는 '굴욕'의 신화가 되어 두 나라의 국내 정치를 다시 흔들었다.
8. 대중매체에서 [편집]
- 헤일의 회고록 《6분》(1996)은 위기 당시 국가안보회의와 비공식 창구의 내막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한 책으로, 10.28 양해각서를 둘러싼 베인브리지의 계산을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한 자료로 꼽힌다.
- 2003년 루이나에서 개봉한 영화 《긴 목요일》은 10월 27일 하루를 RF-4 조종사 오하라 소령의 가족과 벨포르 대통령궁, 크라슬리스크 정치국을 오가며 그렸다. 사비에트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 사비에트의 국영 방송은 1989년 드라마 《둑》에서 위기를 사비에트 지도부가 인내심으로 루이나의 도발을 이겨 낸 이야기로 그렸다. 드라마에는 방위 지원단도, 양해각서도 등장하지 않는다.